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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재교육] 한국 천주교회사 - 7) 병인대박해(1866년)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840
작성일 09-08-1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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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병인대박해(1866년)


      (1) 흥선 대원군과 천주교
      1864년 1월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안동 김씨 가문과 풍양 조씨 일족 사이 에 암투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 지명권을 갖은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12세의 소년을 국왕으로 간택하였는데 그가 고종이다.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서 선택한, 방탕한 생활을 가장 몰락한 왕족으로 행세하던 홍선군을 아무런 정치적 야심이 없는 인물로 생각 하였다. 그래서 왕후는 이하응을 대원군에 책봉하고 정치적 실권을 이양하고 풍양 조씨의 추종 세력을 고위 관직에 등용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본래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고 선교사들의 활동을 묵인하고 신자인 남종삼과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도 하였다. 또한 주위 인물들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고종의 유모가 신자인 박 마르따였고 대원군의 아내인 부대부인 민씨는 박 마르따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매일 기도를 드렸고 베르뇌 주교에게 아들의 국왕 즉위에 대한 감사 미사 봉헌을 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가의 호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박해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베르뇌 주교는 풍양 조씨의 재등장과 득세를 보고 장래의 교회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쁘르띠에 신부는 대원군의 난푹하고 과격한 성격과 학정을 지적하며 교회 장래를 걱정하였다. 이렇게 호의와 적의가 혼합된 상황에서 교회는 꾸준한 활동을 통하여 교세 확장에 주력하였다. 1865년 4명의 신부가 입국하였고 두 곳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교리교육과 신앙 생활의 향상을 위해 문서 보급에 힘을 썼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 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제2의 신학교 설립을 위해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서소문 밖 네거리.
      지금은 기차와 자동차,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찬 서울역 염천교 부근.
      이 곳에서 성인 정하상을 비롯한 무수한 순교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포했다
      (2) 교회 박해 1866년 1월 러시아 선박이 원산항에 나타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때 홍봉주(토마스), 김면호(토마스), 이유일(안또니오)가 조선, 프랑스, 영국의 삼국 동맹안을 방아책으로 제시하면서 이러한 동맹은 선교사들의 외교 적 교섭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는 건의서를 작성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책망하였으나 입궐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하여 남종삼이 삼국 동맹안 건의서를 작성, 대원군에게 제출하고 주교 면담 요청을 받아냈다. 이 계획은 초창기 교회가 무력 시위를 제안한 것 보다는 긍정적인 제안이다. 대원군의 면담 수락은 있었으나 당시의 교회는 즉시 주교들을 모시고 오기에 필요한 재력을 갖추지 못하여 대원군의 요청보다 2주일이나 늦게 상경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급한 대원군은 자기 요청이 천주교측의 무성의와 불경으로 지체되었다고 보고 구정이 가까웠다는 이유로 면담을 미루었다. 이때에 조정에서는 동지사행으로부터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양인에 대한 배척사상을 갖고 있던 양반 세력 과 천주교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던 풍양 조씨 일파의 대신들이 대원군에게 천주교 교섭 수락을 공박하면서 선교사와 신자들의 처형을 극렬하게 주장하였다. 대원군은 천주교 박해가 외세 침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결국은 대신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천주교 박해령을 승인하였다. 1866년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대원군과의 면담을 위해 입궐을 기다리던 중에 체포되면서 교회 박해가 시작되었다. 3월 4일에는 천주교 서적 압수령과 소각령이 선포되고 3일 후에는 ‘오가 작통법’ 시행에 대한 정부의 지시가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의 인상 착의를 전국 관청에 배부하였다. 더욱이 6월 말에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가 박해소식을 전하자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는 7월 13일에 중국 황제에게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에 선전 포고한 사실을 통보하였다. 중국 사신이 한양에 파견되어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프랑스군의 침공소식을 전하면서 협상을 권하자 대원군은 내정 간섭으로 일축하고 오히려 천주교인의 6촌 친척도 중앙정부와 문의 없이 처형할 것을 명하였다. 한편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9월 10일에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양화진에 진입하어 무력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일곱대의 군함을 이끌고 원정하여 10월 14일에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로즈 제독은 선교사의 학살에 대한 보상과 조약 체결을 요구하고 반응이 없자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전등사 전투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선군의 공격에 부상자를 내고 토각하였다. (병인양요). 이러한 사건으로 배외 사상과 쇄국 정책이 굳어지고 함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치열해져 아홉 명의 선교사와 수많은 신자들이 새남터, 서소문 밖, 양화진 등지에서 순교하였고 조선 교회는 ‘제2의 목자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
      파리외방전교회 주교회의
      (3) 신교자유 획득 노력 목자 없는 조선 교회는 국외에서 가능한 활동, 즉 신교 자유를 위한 노력과 출판 사업에 주력하였고 점차 신교 자유의 분위기가 일자 교회 성장에 가장 필요한 성직자의 양성에 노력하였다. 조선 교회는 신교 자유를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시도한다. 하나는 무력시위로서 실패로 끝났을 뿐아니라 천주교 금압 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병인대박해’로 인하여 일어난‘병인양요'는 자국 국민의 학상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보복조치였지만 여기에는 신교 자유의 구현이라는 의도도 밑에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은 병인 대박해 이후 10여 년 동안 조선 입국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선교활동 대신 출판사업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로 ‘조선 교회사’, ‘한불사전’, ‘한국어 문법을 간행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조선 천주교의 문화적 공헌을 의미한다. 둘째로 리뗄 주교는 병인대박해 이전에 신학 교육을 받았던 신학생들과 소년 들을 만주에 보내도록 지시하여 그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주교는 1877년 조선에 입국하여 로베르 신부에게 신학생 교육을 위임하였다. 1879년 블랑 신부는 전라도 장수 큰골이라는 마을로 피신하면서 신학생들을 모아 가르쳤고 188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21명의 신학생을 말레이시아의 페낭으로 유학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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