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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재교육] 한국 천주교회사 - 4) 교계 체제의 확립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920
작성일 09-08-1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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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때, 교회 재건에 나선 정하상(정약종의 둘째 아들)은 10 여년동안이나
전 후 9 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였다. 1825년에는 북경 주교를 거쳐 로마교황성하께
편지를 올리어 하루 속히 사제를 보내주기를 간청하였다.

이 편지야말로 후에 로마 교황청으로 하여금 한국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주교를
이 땅에 보내게 한 유명한 편지가 되는 것이다. (좌) 정하상 초상(우)


      4) 교계 체제의 확립

      (1) 교회재건 운동(1811~1834) 1802년에 이르러 천주교 박해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자 신태보(베드로), 권기인(요한), 이여진(요한) 등이 사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 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교회 재건 운동의 하나로 성직자 청원 운동을 일으켜 1811년에 로마의 교황과 북경의 주교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써서 1812년에 두 차례에 걸쳐 보내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더 이상 북경에 가지 않고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였다. 1816년에 정하상(바오로)은 유진길(아우구스타노), 조신철(까를로)의 도움을 받아 성직자 영입 운동을 재개하였다. 그 결과로 1817년 1월 북경의 두 명의 신부가 파견되지만 안내자가 없어 입국을 하지 못하고 만다. 북경교회의 성직자 파견이 여의치 않자, 정하상과 유진길은 직접 로마 교황에게 성직자를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 신유대박해 이후의 조선 교회에 대해 보고하고 선교사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로마의 포교성성은 조선교회에 대해 여러 가지 각도에서 논의하여 북경주교에게 조선교회의 선교사 파견을 위임하고 북경에서 조선인 신학생을 양성하고 국경 지방에 연락처를 위한 교우촌 형성을 권하였다. 1824년부터 조선교회를 담당할 수도회를 물색하던 중 포교성성은 1827년 9월 우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위촉하였다. 이에 대한 파리 외방 전교회의 답변은 선교사가 부족하고 기존 선교지방에의 급선무가 많으며 조선은 입지가 좋지않아 교통이 불편하고 결정을 내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였다. 이때 조선 선교를 지원한 성직자가 있었는데 그는 당시 샴(태국)의 부주교로 임명된 바르토로메오 브뤼기에르 신부였다. 그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미온적인 태도를 반박하면서 1829년 포교성성에 조선 선교를 자원하는 편지를 보낸다. 한편 1830년 조선교회와 그 복음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포교성성 장관인 까삘라리 추기경이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선출되었다. 새 교황은 1831년 9월 9일에 두 개의 교서를 반포하여 1) 조선 교회를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시켜 교황 대리 감목구로 설정하고, 2) 그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그러나 브뤼기에를 주교는 만주에서 1834년 43세의 나이로 선종하여 자신의 교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였다. (2) 기해 대 박해(1839년)

      앵베르주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의 순교장면(1839. 9. 21)
      19세기 전반의 조선은 순조 이후 국왕들이 모두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행해지고 척족 사이의 정권 투쟁이 격심해지는 혼란에 빠진다. 1805년에 정순왕후가 죽자 경주 김씨를 밀어내고 안동 김씨가 새로운 실권 세력으로 등장한다. 이에 순조는 풍양 조씨를 등용하여 안동 김씨를 견제하게 하여 두 외척은 연립 세도의 형태를 통해서 공존하면서 치열한 정권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세도정치는 조선 왕국의 사회를 극도로 악화시키고 부정 부패가 판을 치게 되어 국가재정의 수취 체제가 문란해져 국민이 동요를 하게 된다. 게다가 계속 되는 재해로 민심의 이탈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이농현상이 생겨 유민과 화전민이 증가하고 곳곳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 정부 당국을 괴롭혔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천주교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보이던 안동 김씨 일가가 1838년에 풍양 조씨 일파에 의해 밀려나자 정부의 교회 정책은 관용에서 탄압으로 전환되었다. 풍양 조씨 일파의 이지연은 개인적으로 천주교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던 그는 북경 사절단의 일원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반 천주교 정책을 편다.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시파인 안동 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관대한 입장을 난처하게 하여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의도와 민심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반 정부 행동은 엄벌에 처한다는 본보기로 국가의 금교령을 위배하는 천주교인 들을 처벌하게 된 것이다.
      장하에 온몸이 피투성이 되어도 용감하게 주를 증거하는 어린 유베드로(13세)의 장한 모습
      천주교 박해는 1839년 1월 16일, 조 프란치스꼬와 권 바오로의 가족을 체포 하면서 시작되었다. 계속되는 체포로 감옥이 가득차자 정부는 석방이나 처형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이지연은 천주교를 박멸하기로 결심하고 그러한 결정을 순원왕후에게 주청하여 사학 토치령이 반포된다. 이로써 기해년의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이제 한양과 지방에서 수많은 천주교인 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 등 2백여 명이 옥사 또는 사형으로 순교하였다. 특히 배교자인 김순성의 밀고로 앵베르 주교의 은신처가 드러나 주교가 자수를 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도 주교의 권유로 9월 자수하여 한강 새남터에서 9월 15일에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한편 1839년 11월 23일 김 왕대비의 명의로 척사윤음이 반포된다. 이는 주자학의 입장에서 본 천주교의 오류 즉 인륜의 부정, 조상 제사의 거부, 신주의 파괴, 성사의 미신적 행위, 천당 지옥의 현혹설 등으로 천주교의 모순성 을 알리어 박해로 동요된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기해년의 박해는 1839 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1840년에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풍양조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됨으로 1~2년간 계속되었다. 기해박해는 지난 신유박해 보다 종교적 이었고 따라서 양반,중인,상민의 구별 없이 또한 남녀노소, 십대 초반 소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특히 부녀자의 순교자가 많았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3) 정하상(바오로)

      상재상서를 전해주는 정하상 바오로
      정하상(바오로, 1795~1839)은 경기도 광주 지방의 마재에서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대표적 순교 가정으로, 바오로의 부친인 정약종 이외에 어머니 유소사 (체칠리아), 이복형 정철상(까롤로), 누이 동생 정정혜(엘리사벳)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치명하였다. 그의 부친과 이복형이 순교하였을 때에 정하상은 6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문중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1823년에 정하상은 유진길(아우구스띠노)과 조신철(까를로)를 만나 그들과 협력하여 마침내 한 명의 중국인 신부와 세 명의 프랑스인 성직자를 모실 수 있었다. 앵베르 주교에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교육을 받기도 했으나 기해대박해로 교육이 중단되어 사제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사학토치령이 반포되자 정하상은 앵베르 주교를 피신시키고 자신의 체포를 예감하고 써놓은 ‘상재상서”를 관가에 제출하였다. 이 소책자는 한국교회 역사상 유일한 호교론으로 ‘재상에게 올리는 글’ 이란 뜻으로 기해박해 때 박해의 주동자인 우의정 이지연에게 가톨릭교 교리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정하상이 작성한 3,400자로 된 가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임. 내용은 1) 천주교를 설명하는 부분 2)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 3)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하며 가톨릭이 조선의 주자학적 전통에 크게 어긋 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윤리를 바르게 하는 미덕이 가톨릭교 정신 속에 있음을 설명하며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는 애절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심문을 당하면서도 배교를 끝까지 거부한 그는 1839년 8월 15일 동료 유진길과 함께 모반무도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서소문 밖에서 4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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