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예수수녀회
  - 성경
  - 설립자 말씀
  - 성인들 말씀
  - 대림
  - 성탄
  - 사순
  - 부활
  - 연중
  - 예비자 관련
  - 유아교육 관련
  - 이주민 사목관련
  - 신자 재교육
  - 제단체 자료
  - 캠프
  - 피정
  - 본당 행사
  - 각종 결재 양식
  - 훈화
  - 기타
         
 
Home > 자료실 > 교리
 
[신자 재교육] 한국천주교회사-3) 신유박해(1801년)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987
작성일 09-08-14 11:25
..




      3) 신유박해(1801년) (1) 신유박해 배경과 내용 18세기 말부터 천주교가 조선 사회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왕실에서조차 천주교 신자가 나오게 되었고 국왕 정조뿐만 아니라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제공 등도 이들을 오히려 변호하는 입장이었다. 일찍이 이익은 마태오리치를 성인이라고 일컫고 천주학도 가볍게 보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사실 천문.수학.지리.농학.물리 등 의 과학지식은 서양이 동양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고 그것이 서양의 동양진출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래서 정계에서 소외된 재야 남인계열을 중심으로 점차 천주교에 심취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승훈, 이벽, 권철신, 이가환, 정약용 등은 바 로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특히 정약용, 이가환은 뛰어난 문장과 단아 한 모습으로 일세에 추종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서학에 심취하게 되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모두 추종하였던 것이다. 1794년 말에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이 시작되 었고 1800년에 교인이 1만 명으로 늘어난 천주교는 교세가 급속도로 확 산되었다. 이렇게 되자 천주교를 공격하는 정파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여 성토하고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을 비난하는 상소를 연일 올렸 다. 그러나 정조는 사교는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유 학의 진흥에 의해 막을 수 있다고 하면서 적극적 박해는 가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남인 시파의 실권자인 채제공의 영향도 작용하였다.
      이순이 루갈다의 편지와 십자가
      피의 숙청은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자 곧 불어 닥쳤다. 더욱이 그동안 천주교를 비호하던 채제공까지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천주교를 사갈시하던 벽파로 바뀌면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 나게 되었다. 이미 영조 말년부터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벽파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도세자의 장 인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시파 사이에는 정치적 갈등이 있어왔다. 정조대에 정치에 참여한 채제공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들은 시파로 활동 하고 있었다.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을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다가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11세)로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 자 흑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대왕대비 정순왕후를 움직여 시파에 대하 여 정치적 공세를 가하였다. 이때 벽파의 핵심인물은 심환지,김관주, 권유,김달순 등이었고 그 선봉장은 심환지였다. 심환지는 1793년 이후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병조,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일찍부터 남인의 채제공, 이가환,이승훈 등을 이단으로 몰아 그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 섰던 인물이다. 그는 남인 뿐만 아니라 소론계의 서명선도 공격하여 이른바 벽파의 선봉장으로 알려졌다. 그는 1798년 우의정에 임명되어 명실상부하게 벽파의 영수가 되었고 이어 영의정에 올라 정권을 장악 하고 채제공을 타도하고자 하였으나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던 터 였다. 이런 가운데 신유박해가 터지자 심환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홍봉한의 아들 홍낙임을 역적의 주모로 몰았을 뿐아니라 죽은 채제공이 이에 붙좇았다고 하여 남인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심환지 등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 즉 애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인륜을 저버 린 종교라 하여 탄압을 가하였다. 그러나 사실 벽파의 대신들보다 대왕 대비가 한술 더떠 그 배후인물을 철저히 밝혀 낸 후에 관련자들을 처형 하라고 지시하였다. 대왕대비는 이를 위하여 남인 목만중을 대사간에 임명하여 이사건의 수사를 맡겼다. 채제공 일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목만중은 대사간이 된 이후에 이가환,이승훈,정약용,정약전,정약종, 홍교만,홍낙민,이기양,권철신 등을 성토해 드디어 그 배후 인물로 중국 주문모를 밝혀냈다. 천주교는 사학으로 엄금되었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다섯 집을 한 통으로 조직하여 연대책임울 지운 조직 – 범죄자의 색출, 세금징수, 부역동원 등이 목적)이 실시되어 가톨릭 신자에 대한 수색이 엄격해졌 다. 이 와중에 남인의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붙잡혀 정약종. 홍낙민 (바오로). 최창현(요한). 홍교만(프란치스코). 최필공(토마스). 이승훈 강완숙 등은 참수되었고, 이가환. 권철신(암브로시오) 등은 옥사하고 정약용(세례자 요한). 정약전 등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각각 유배당하 였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순교하고 주문모 신부도 자수하여 군문 효수 당하였으며, 박해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전하는‘황사영 백서’를 쓴 황사영(알렉산델)과 유항검 등 300명 이상의 교우가 순교 함으로써 초창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두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초기 천주교회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주문모 신부의 순교로 조선교회는 33년간(1801~1834) 목자 없는 시대를 맞게 된다. 신자들은 ‘천주학쟁이’라는 주위의 비난과 물질 적으로는 노비생활을 하거나 재산을 몰수 당하여 큰 곤란을 당하게 된 다. 둘째,교회조직에 있어서 양반 계급의 지도자들이 순교한 이후 지도층이 순교한 양반 계급 지도자들의 제자들과 중인 계급의 신자들인 제2세대 의 인물로 바뀌었고, 박해를 피해 각처로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 외진곳 에서 새로운 공동촌(교우촌)을 형성함으로써 신앙을 더욱 널리 전파하여 전국의 교우촌은 35개 지역을 헤아리게 되었다. (2) 박해 원인 ① 조상제사의 문제 .유교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효이다. 효는 백행지본이다. 그러므 로 불효는 일천가지중에 가장 큰 죄이며 효중에 큰 부분이 제사이다. .중국의 마태오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할 때 배타 방지를 위해 조상제사 는 정치적 의식이요, 기독교는 유교의 발전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종교가 혼합적이었다. 후에 선교사 도미니크 일행이 잘못된 이런 것 을 보고하자 교황 이노센트 10세가 제사금지를 내림. .조상 제사 때문에 첫 희생된 사람은 윤지충이다 윤지충은 전라도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하고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에서 교리를 받고 감화되어 3년후 입교함. 그리고 모친이 별세 했을 때 상복도 입 지 않고, 호곡도 하지 않고, 위패도 모시지 않았으며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외종형 권상연과 함께 처형되었 다.(1791년 신해박해) ② 붕당적 요소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 – 직접적인 원인 .영조때부터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해서,관동 지방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그 때는 사색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영조왕은 당쟁을 줄 이려고 힘을 썼고 정조대왕도 성품이 어질어서 당쟁을 줄이려고 힘 을 썼다. .사도세자 문제 발생시 시파(세자를 동정하는 파)에 남인인 천주교도 가 많이 가입해 있었다. 숙종때부터 남인 세력이 약화되었고 남인에 속해 있으면 등용길이 막혔다. 이런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제공이 있었는데 1799년 사망했고, 정조대왕이 또 사망하자 천주교 박해가 터졌다. .정조 아들 순조(11세)가 왕에 오르자 정순왕후(정조의 첩)가 순조 뒤에서 정치를 했다. 정순왕후 김씨는 시파계에 의해 귀양을 갔다가 사망한 오빠 김귀주의 원수를 갚고자 천주교인 또는 남인계 시파인 정적을 제거하기위해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채제공이 죽자 죽은 후 관직까지 박탈함(1801년) .1801년 서학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함.“서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에 반역하고, 교황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아들도 안낳고 밑의 똑똑한 자를 뽑아 자기의 위치를 넘겨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세습 윤리와 안 맞아 박해해야 한다고 함.” ③ 황사영의 백서(帛書)가 문제됨: 교회 박해를 정당화 시켜주는 계기 .백서란 비단에 쓴 글을 말하며, 박해받는 천주교를 구하고자 북경의 주교에게 길이 62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122 행 13,311 자에 달하는 한문 편지를 보냈는데 도중에 들켜서 가톨릭은 매국종교의 지탄을 받게 되고 박해를 가속화 시킴 .내용: 첫째 부분은 신해박해에서 신유박해까지의 조선의 실정과 주문모 신부의 순교등의 내용을 담고, 둘째 부분은 조선교회 재건을 위한 몇가지 방안을 제시한 내용이다. 첫째 방안은 청의 황제가 조선의 왕에게 압력을 넣어 선교사를 받아 들이도록 하고, 둘째는 조선을 청의 부마국으로 삼아 천주교가 발전 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셋째 방안으로는 위의 방안들이 실현 될 수 없을 경우 서양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무력시위를 통해 조선 국왕으로부터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는 다는 것이다




게시물 71건
번호 사진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56  [예비자 관련] 가톨릭과 카톨릭 천주교 관리자 2009-08-14 698
55  [예비자 관련] ▶ 가톨릭과 동방교회, 개신교의 차이점 관리자 2009-08-14 659
54  [예비자 관련] 가상칠언과 교중미사란? 관리자 2009-08-14 980
53  [예비자 관련] 피정이 뭐에요? 관리자 2009-08-14 707
52  [예비자 관련]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INRI 는 무슨 뜻일까요? 관리자 2009-08-14 733
51  [신자 재교육] 한국 천주교회사 - 4. 종교자유(신앙자유)와 그 이후의 교회 역… 관리자 2009-08-14 797
50  [신자 재교육] 한국 천주교회사 - 7) 병인대박해(1866년) 관리자 2009-08-14 866
49  [신자 재교육] 한국 천주교회사 - 6) 철종시대의 교회(1849~1864) 관리자 2009-08-14 872
48  [신자 재교육] 한국 천주교회사 - 5) 병오박해(1846) 관리자 2009-08-14 964
47  [신자 재교육] 한국 천주교회사 - 4) 교계 체제의 확립 관리자 2009-08-14 933
46  [신자 재교육] 한국천주교회사 - (3) 박해시대 신자들의 신심생활 관리자 2009-08-14 794
45  [신자 재교육] 한국천주교회사-3) 신유박해(1801년) 관리자 2009-08-14 988
44  [신자 재교육] 한국 천주교회사 -(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관리자 2009-08-14 943
43  [신자 재교육] 한국천주교회사 - (3) 조상제사로 인한 순교 (신해박해: 1791년) 관리자 2009-08-14 1053
42  [신자 재교육] 한국 천주교회사- 2) 초기 교회사의 전개 관리자 2009-08-14 816

 1  [2]  3  4  5  

 
 
 
(우:136-802)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로 9길 73 선한목자예수수녀회 | TEL : 02-919-2754   E-mail : co-sgbp@hanmil.net
Copyrightⓒ2004 by SJBP.All Rights Reserved.